한계를절개하는 우로보로스의 산책자들
The Strollers (Flâneurs) that Break through the Bounds on the Ouroboros



글_남웅
Text by Nam Woong
번역_조윤성
Translated by Yoonsung Cho

출처
학고재 모티프 전
The text is oriented from a group show <Motif> at Hakgojae gallery

질문은 간단하다. ‘왜 예술을 하는가.’ 완전한 답이 불가능한 질문은 무게도 책임도 갖지 않는다. 아니, 질문은 불가능한 답을 예비한 가운데 많은 맥락과 정동을 예비한다. 누구라도 위의 질문이 향할 것이고, 정답을 얘기하지 못할지언정 최소한 육하원칙의 항목을 동반한 설명들이 구구절절 이어질 것이다. ‘왜’가 아닌 어떻게, 언제와 무엇이 붙은 질문은 정답을 우회한 보다 많은 모티프를 열어둔다. 정답이 부재한 자리엔 셀 수 없는 설명들이 넘친다. 범위를 좁히고 세목을 정해 이야기한다면 서술 가능한 의미들이 타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질문에 당연시된 예술은 어떤 사조와 세계관에 여과된 개념인가. 예술의 모티프를 묻는 대상이 청년작가를 향하는 데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가. 청년의 당사자성뿐 아니라 시기적 불안정과 가능성 따위의 세속적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청년은 예술에 어떻게 접목되는가. 그 모습은 어떠한가. 청년작가의 호명이 아직 유효하다면, 이들은 어째서 아직도 청년으로 호명되고 있는가.

모티프는 통시적이고 개별적인 동시에 공시적이고 보편적이다. 시대를 관통하는 작업의 동기는 근원적이고 추상적일 테지만, 동시대 작가들로 한정하면 작업의 관점, 사회 맥락과 사건, 이론, 개인사 등 낮은 포복으로 편재해 있던 질문들이 덤벼들 것이다. 모티프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실마리를 던지거나, 근본적인 질문으로부터 동시대 예술을 이야기할 수 있는 폭을 확장한다.

중략

2. 불온한 산책으로서 예술

의식적으로 역설을 실천하는 작업은 항과 반대 항을 끊임없이 순환하고 배회한다. 이는 많은 참여 작가들이 언급했던 ‘산책’의 키워드와 연결된다. 산책은 한편으로 작업의 궤적을 밟아나가는 작가들의 경로를 가리키지만 표지 없는 배회가 되기도 한다. 산책은 시행착오와 성과를, 참여관찰과 거리두기를 포함한다. 동시대를 거슬러 밟아나가는 시도는 민족지적 기록이 될 수 있다. 규율의 구속으로부터 다소 간 거리를 둔 배회는 주류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 하위문화와 사각지대에 눈을 돌린다. 변화를 요구하는 행렬을 따르지만, 끈질기게 불화의 리듬을 찾는 이들은 프로파간다 한복판에서마저 그 연안을 맴돈다. 자리를 찾기 위한 시도는 동시에 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찾기를 포기한 상황을 필사적으로 읽고 감각적으로 옮기는 시도로 변주한다. 그 모습은 불완전성을 드러내되, 온전한 의미부여를 거부하고 불완전을 잔여로 남기며 감각적 여운과 첨예한 담론의 틈을 낸다.

이희준은 산책을 문자 그대로 모티프 삼는다. 그는 건축물과 내부 인테리어로부터 도시 풍경의 디테일로 소재를 옮긴다. 사물로부터 시각형식을 변별하는 작업은 수직과 수평, 패턴으로 구성되는 사물의 흔적 속에 사물을 생략한다. 아니, 사물은 물화된 패턴의 공적을 추적하는 과정에 사후 확인된다.

이번에 선보이는 <어 쉐이프 오브 테이스트(A Shape of Taste)>(2018)에서 작가는 홍대, 연남동, 한남동 등 근래 환경개선사업과 도시재개발을 통해 급격히 변화를 겪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메가시티 서울에서 변모하는 주택가의 스킨과 색상을 참조한다. 그가 포착하는 풍경은 전체적 경관보다 도시 건축의 단면들이 집적되고 압축된 표면의 이미지다. 채집한 풍경들을 5*5cm 화면에 드로잉 하는 초기 공정에는 대상 선정과 이미지 수집, 줌업과 커팅, 색채 가공이 포함된다. 이를 53*53cm 화면에 편집하여 옮긴 뒤, 각 프레임들을 격자 모양으로 배치하고, 배치된 이미지들을 다시 182*182cm 대형 화면에 재편집한다. 풍경의 패턴을 찾아 배열하고, 대형 화면으로 반복 구성하는 단계에는 반복적 페인팅을 나란히 배치하는 수평성과 더불어, 공간을 거듭 접어나가면서 유닛을 확대하는 계층적 수직성이 교차한다. 포착한 경관을 정방형 하드엣지로 가공하고, 이를 수열적으로 나열하는 동시에 한 화면에 접합하는 작업은 실제 도시를 사진이미지로, 일러스트로, 회화로 재가공함으로써 도시와 건물의 지표성을 재지표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련의 과정은 구체성을 생략하지만, 소거된 풍경이 사이즈를 달리하며 전시장의 경관을 구성함에 따라 그의 작업은 일종의 유사-풍경을 제안한다. 도시의 인공적 속성을 가공하는 작업은 인공의 실재 장소성을 지우는 동시에 인공성을 재창안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이른바 번역된 장소성은 실제 장소와 상이한 화면 위의 패턴이고, 작가를 통해 편집되고 여과된 감각적 표현의 평면이다. 화면은 기호를 삭제한 흔적의 집적물에 가깝다. 여기에 화면을 둘러싼 프레임은 집적된 화면을 견고하게 감싸고 엮고 지탱함으로써 도시의 질서를 전유한다. 규칙이 반영된 작업에 주체의 정동은 숨겨지거나 생략되어 보인다. 무심한 산책자로서 작가는 변해가는 거리의 패턴과 색상을 관찰하고 채집하는 기록자이자, 목적과 기능을 생략하면서도 도시 리듬에 몸을 동화시켜 패턴을 접합하는 편집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도시의 기호를 파괴하고, 추상화하며 다시금 도시 풍경에 이접시킨다. 주목할 점은 일련의 공정에 연상할 수 있는 디지털 가공과 시뮬레이팅을 일절 거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프로그래밍에 이입한 손작업은, 반복적인 작업 단계 속에 생략된 장소성과 대기의 온도를 색과 패턴에, 붓 자국을 통해 음미하도록 한다. 작업은 동시에 휴대에 용이한 디지털 촬영 장치를 경유하여 인스타그램과 같은 전시형 SNS의 격자 프레임으로 배열된다. 일련의 장치들은 그가 개입하는 주관성마저도 매체환경에 철저히 이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작가가 봉착한 주체성의 모순을 대면한다. 한편으로 작가가 전유하는 도시풍경은 외지인의 시선을 끌기 위한 기호들의 조합으로 채집된다. 하지만 그 결과물 역시 실내 인테리어로 소비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지 않아 보인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된 장소를 산책하며 맥락을 생략한 작업은, 맥락이 콘텐츠로 납작해지며 하나의 경관으로 소비되는 도시풍경의 변이과정을 작업으로 변주하고 화이트큐브로 수렴시킨다는 해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속물적 전시가치로 도배된 도시와 작업을 속물적으로 읽고 소비하는 태도 사이에 놓인 주체성은 텅 비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위의 물음에는 의식화된 감각적 형상으로서 작업이 배제되어 있다. 외부 풍경을 기호화하고 실내에 스케일 있는 화면으로 재구축하는 과정은, 내부와 외부의 구분을 교란하는 공간과 평면 사이 사유가 작동하기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산책과 채집, 가공과 편집을 주관하는 프로그래밍화된 예술가의 몸을, 그로부터 아직 독해되지 않은 감각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 ‘예술가는 내용 없는 인간이다. 그는 표현의 무(無) 위로 끝없이 떠오르는 것 외에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스스로의 한계라는 이해할 수 없는 환경 외에 또 다른 일관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2] 라는 이론적 설명은 결국 실패와 체념을, 견유(犬儒)와 냉소를 취할 수밖에 없음을 함의하지만, 동시에 내용 없음 속에서 아직 시야에 잡히지 않은 대상들을 투영한다.

작업 속에 작가의 동선과 감각을 읽는 것이 과제라면, 이는 중첩과 반복 위에 역설을 품고 있는 작가의 내적 갈등과 협상의 과정을 살피는 시도로 설명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내용 없음’이 강제당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부정된 타자로서 불온한 얼굴을 드러내는 시도는 예술가가 스스로를 비우며 공허한 감각을 펼쳐놓기 이전에, 정체성이 함의하거나 생략하고 있는 사회적 맥락의 독해를 요청한다. 여기에는 동시대적 감수성을 형성하는 사건의 코드들이 신경망처럼 연결되어 있다. 앞서 언급된 작가들 역시 전시적 기호의 집적체로서 도시를 산책하고, 그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것들에 시선을 던지거나 불평등에 저항하는 집단적 행동들을 본다. 행동에 참여하거나 또는 참여하지 않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예술가는, 풍경 속에서 풍경을 기술하며 풍경의 흐름과 구조를 살피고 풍경 너머를 향하는 손끝의 감각을 실천한다.

예술은 스스로를 거스르고 전유하고 파괴함으로써 존속하지만, 여기서 사회적 맥락은 분리되지 않는다. 예술은 강제당한 침묵에 대한 신호로 나타나거나, 시각을 포함한 감각의 형식을 규정하는 이상이나 체제로부터 뚫린 구멍, 부재를 드러내는 행위로 수행된다. 때로 그것은 기억을 위한 기록으로, 온전히 의미부여할 수 없는 징후적 기록으로 드러난다. 관습과 내성을 거슬러 텍스처를 새로 내는 작업은 기존의 방식과 다른 재현의 대상과 형식을 시각화한다. 이는 동시에 의식구조와 몸의 의미까지 재편한다. 숨겨진 목소리를 가져오고 낯선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시도는 비스듬하고 어정쩡하게 살아 있는 이들의 말하기와 보기로서, 건강하고 진지하게 살아 있는 이들의 말하기나 보기와 다르다.[3] 이는 예술이 애도와 정치, 재현의 윤리에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후략

[2] 조르조 아감벤, 『내용 없는 인간』, 윤병연 옮김, 자음과 모음, 2017. p.124.
[3]  양효실, 『불구의 삶, 사랑의 말-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현실문화, 2017. p.13.


The question is simple. ‘Why make Art?’ The question that is impossible to have a complete answer to has neither weight nor obligations. Rather, the question prepares to deal with numerous contexts and affects (情動), while expecting an impossible response. Anyone would be asked the question above, and even if a correct answer cannot be claimed, at least explanations supported by who, what, where, when, why, and how will be belabored. Questions that have how, when, and what rather than ‘why’ open more motifs that bypass the correct answer. Countless explanations overfill the place of the answer’s absence. Perhaps describable meanings may be able to form connecting links if we narrow down the range and discuss through specific subjects. For example, in which trends and worldviews does the general idea of art, as from the question above, filter through? On what grounds does the target asking the motif of art head towards young artists? With secular meanings, such as the relevance of the young generation as well as their periodic instability and potential in mind, how would the young generation integrate into art? What would it look like? If the title, ‘young artist’ is still valid, why are they still called ‘young’?

  A motif is diachronic and independent, and at the same time, synchronic and universal. Although the motive for artworks that transpierces the times is primitive and abstract, when restricted to contemporary artists, questions such as the perspective of artworks, social context and events, theory, personal affairs that were crawling ubiquitously, will start to tackle. Motif either throws a clue to the more fundamental question or expands the breadth of discussing contemporary art from the fundamental question.

syncopation

2. Art as Rebellious Strolling

  The artworks that implement the paradox consciously endlessly circulate and wander from one end to the other. This relates to the keyword, ‘strolling,’ which many participating artists in this exhibition have mentioned. Strolling indicates the route taken by artists who follow the trace of their works, but on the other hand, it may as well as be a directionless wandering. Strolling connotes trial and error, participatory observation, and keeping distance. The attempt to proceed forward against the contemporary times may be an ethnographic record. The act of wandering that keeps distance from discipline and confinement to a degree diverts its doer’s attention to the subcultures and blind spots that are not easily spotted in the mainstream. While following the passage that requires change, the artists who persistently seek the rhythm of discord lingers the coast even in the midst of propaganda. The attempt to seek their place transforms into desperate comprehension and the attempt to sensuously convey the situation in which they are unable to find their place or have given up searching. This state reveals incompleteness, and at the same time, denies complete ascription of meaning, leaves the incompleteness as residue, and makes room for sensuous lingering impressions and acute discourse.

Heejoon Lee uses the word ‘strolling’ as it is, as his motif. He shifts his subjects from architecture and their interiors, to the details of cityscapes. His works that distinguish visual forms from objects eliminates the object itself within the vertical, horizontal, and patterned vestige of the object. No, the object is verified after the process of tracing the outcome of materialized patterns.

In the series, A Shape of Taste (2018), presented in this exhibition, Lee wanders around areas that experienced rapid change due to environmental improvement and urban renewal such as Hongik University district, Yeonnam-dong, Hannam-dong, etc. and refers to the skin and color of the transforming suburban area in the megacity, Seoul. The scenery that Lee captures is the surface image of accumulated and compressed layers of city architecture, rather than an overall landscape. The early process for his works in which he sketches the collected sceneries onto 5x5cm picture-screens encompasses selecting the subject and collecting images, zooming in and cutting, and fabricating colors. He then edits and transfers these sketches onto 53x53cm picture-screens, arranges the individual frames into a grid, then re-edits the arranged images on a large 182x182cm picture-screen. In the phases where the pattern of the scenery is obtained and arranged, and recomposing it onto a large-scale picture screen, the horizontality of arranging the repetitive paintings side by side and hierarchical verticality that expands its units as it repeatedly folds space intersects with each other. The process of fabricating the captured sceneries into square Hard-edge painting styles, and sequencing and uniting the images into one picture-screen is also re-indexing the index of the city and architecture through reprocessing the city into photographs, illustrations, and paintings.

The series of processes omits details, but the erased scenery constitutes the scenery of the exhibition space by different sizes, and Lee’s works suggest a kind of analogous-scenery. The process of fabricating the artificial properties of the city is erasing the actual spatiality of the artificial, and at the same time, an attempt to reinvent the artificiality. The so-called translated spatiality is the pattern on the picture-screen, different from the actual space, and the flat plane of sensuous expression edited and filtered through the artist. The picture-screen is like an accumulation of the vestige of eliminated symbols. The frame that encloses the picture-screen browses the order of the city by substantially enveloping, compiling, and sustaining the accumulated picture-screens. The ‘affect’ of the principal subject seems to be concealed or omitted in the works in which rules are applied. The artist, as a dilettante stroller (flâneur), is a recorder who observes and collects the patterns and colors of the transforming streets, and shows aspects of an editor who connects patterns by engulfing his body in the rhythm of the city while omitting purpose and function. Lee demolishes and abstracts the symbols of the city, and reappoints them into the cityscape. The fact that the artist never undergoes through any digital processing or simulating in his processes should be noticed. The hand-work that reflects programming enables the viewers to savor the omitted spatiality and the temperature of the atmosphere in the repeated processes through brushstrokes of the colors and patterns. Lee’s works are sequenced in a grid layout of display type social media like Instagram, via sufficiently mobile digital photography devices. The devices used in his works demonstrate that even the subjectivity, intervened by Lee, is thoroughly penetrated by the medium used.

Here, we face the contradiction of the subjectivity that Lee encounters. The scenes from the cityscape where the artist browses are accumulated as the combination of symbols that are meant to attract the foreigner’s eyes. However, the outcome is not far from the possibility of being utilized as an interior. The works that stroll around places of gentrification and omits context are restrained to the interpretation that they transform the modification of the cityscape that flattens into content to be utilized as a scenery, and assemble into a white cube. Isn’t the subjectivity placed between the city flooding with materialistic display values and the attitude of philistine comprehension and consumption of the works empty? However, the works as ritualized intuitive images are excluded in the question above. The process of symbolizing the scenery from the outside and reconstructing it indoors into a large-scale picture-screen is only possible because thought operates between the space and planes that throws the division of the inside and outside into confusion. If so, how would the programed body of the artist that conducts strolling and accumulating, fabricating and editing, and the impressions that are yet to be comprehended from the bodies? The theoretical explanation deeming that, “the artist is the man without content, who has no other identity than a perpetual emerging out of the nothingness of expression and no other ground than this incomprehensible station on this side of himself”[1]implies that artists have no choice but to eventually take in failure, compliance, skepticism, and cynicism. However, it also projects the subjects that are yet to be caught by the eye, within the absence of content.

If seeking and understanding the artist’s flow of movement and intuition is the goal, it may be explained as the attempt to seek to negotiate with the artist’s inner conflicts that embrace the paradox on top of overlapping and repetition. On one hand, we may consider the case of ‘absence of context’ being enforced. The attempt to reveal the rebellious face as rejected outsiders requires the comprehension of social context that identity implies or omits before the artists let go of themselves and lay out the hollow impressions. Here, the codes of events that form the contemporary sentiments interconnect like the nerve net. The artists mentioned above also stroll around the city as an accumulation of symbols of display qualities, and pay attention to the unexposed things within the city, or collective resistance against inequality. The artists who roam the streets, either participating or not participating, depict the scenery within the scenery, examines the flow and structure of it and implements the sense of their fingertips heading beyond the scenery.

Art subsists by defying, browsing, and destroying itself; but the social context does not separate here. Art appears as a signal for the enforced silence or implemented as exposing the hole penetrated by the ideal or system regulating the form of senses including sight, or the absence of it. Sometimes they appear as records for memory, or portent records that may not be completely granted meaning. Defying customs and conventions, and creating new textures visualize the material and form of reproduction different from existing methods. At the same time, they also adjust the structure of consciousness and even the significance of the body. The endeavor to bring the hidden voices and look at the world through an unusual perspective is the obliquely and obscurely living speaking and seeing; it is different from the healthy and earnestly living’s speaking or seeing.[2]This is the point where art meets grief, politics, and the morality of reproduction.

compassion


[1] Giorgio Agamben, The Man Without Content, trans. Georgia Albert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 p. 55.
[2] Hyosil Yang, Disabled Life, Word of Love – For Those Who Do Not Want To Grow Up, (Seoul: Hyunsil Books, 2017), p. 13.


회화의 막 
An Outer Layer of Painting

글_김시습
Text by Si seup Kim
번역_이나정
Translated by Najung Lee
11. 2017

회화 작가인 이희준은 근래 6~7년 정도의 본격적인 활동기간 동안 건축물, 실내 인테리어, 스피커 등 도시 내 다양한 인공물을 주로 자기 그림의 소재로 삼아왔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그가 실질적으로 관심을 갖고 회화를 통한 실험으로써 연구를 해온 대상은 따로 있는 것 같다. 나는 표면이나 막(膜) 등의 열쇳말이 이희준의 회화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희준이 다루는 위에서 언급한 소재들은 대부분 맥거핀으로 기능한다. 달리 말해 이 소재들은 그 자체로 작가가 관심 가지는 대상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대상을 담아내는 표면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한다.

대학 시절 그가 그린 <Untitled>(2011)를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는 형상은 90년대에 중산층 사이에 유행했을 법한 2층 양옥집이지만, 이희준이 그림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이 형상 자체보다는 그 형상을 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노란색의 막이 아닌가 싶다. 이는 프로젝터의 고장으로 노랗게 잘못 투사된 사진 이미지를 보고 이희준이 캔버스에 유화로 옮긴 그림이라고 한다. 이때 그가 그린 것은 양옥집이라기보다는 오류가 발생한 이미지 혹은 이미지의 오류 자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스피커를 그린 그의 그림은 또 어떤가? 이희준은 올해 초 열렸던 개인전 《The Speakers》에서 영등포 위켄드의 네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을 스피커를 그린 그림으로 채웠던 적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강조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스피커 자체라기보다 실제로 음악이 흘러나왔다면 그 음악을 통해 진동했을 캔버스의 표면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정육면체 모양의 위켄드 공간은 그 자체로 스피커를 닮았기에 이희준이 스스로 “시각의 청각적 체험”이라 부른 것을 실로 경험하게 만들었다.

그가 관심 갖는 막은 종종 회화의 표면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이희준은 거의 강박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림의 표면에 주목한다. 그의 거의 모든 그림은 하드엣지(hard-edge) 계열의 회화와 같이 면과 면의 경계를 날카롭게 구분한다. 붓질은 최소화되어 나타나며, 강조되더라도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형태로 제시된다. 그리하여 그의 그림은 그 자체에서 공산품의 느낌이 물씬 느껴진다. 재현하는 대상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보다 그림의 표면이 더 살아있는 것처럼 두드러지는 형국이다.

이런 까닭에 이희준이 어떤 대상을 재현한다고 한다면 재현하는 대상과 이희준이라는 작가 사이에는 최소한 이중삼중의 막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런 구조는 그의 작품으로부터 어떤 고전적인 효과를 찾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린다. 표면 너머의 대상 쪽에 미련을 두면 둘수록, 그림의 의미는 자꾸 표면 위로 미끄러져 흘러내린다.

이번 전시에서 이희준의 시선이 머무른 곳 또한 이러한 막이다. 전시작은 모두 블라인드와 그것의 그림자를 그린 회화와 드로잉이다. 작가는 인테리어 공사를 방금 마친 자신의 집 거실 벽면에 에메랄드빛으로 블라인드의 그림자가 맺힌 것을 보고 그것을 소재로 삼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블라인드라는 대상 자체보다는 찰나적으로 맺힌 이미지의 표면과 그것의 변주이다.

이희준은 이번 전시의 설치가 끝난 직후 평문을 쓸 사람으로서 남들보다 먼저 전시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주었는데, 이때 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것은 역시 그림의 표면이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다수의 그림 표면에 광택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마감을 위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붓과 물감은 유화의 재료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광택을 없애주는 매트 바니시라는 미디엄을 사용했다고 그는 말했다. 반대로 광택이 가미된 부분은 지나칠 정도로 많은 광택이 났다. 표면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롭게 다가온 요소는 그림의 레이어와 붓질이었다. 멀리서 봤을 때 일견 밋밋하고 얄팍하게 보였던 회화의 표면은 이희준이 일부러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 붓 자국으로 빼곡히 메워져 있었으며, 캔버스의 모서리에는 수차례 겹쳐 올린 층들이 드러나 있었다.

이희준은 그림의 이러한 표면에 “스킨”이라는 훨씬 더 가벼운 느낌의 이름을 붙여준다. 가볍다고 했지만 사실상 무게가 없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스킨이란 알다시피 피부나 껍데기를 뜻하는 용어이면서, 웹상에서 사용자 화면을 취향에 맞게 변경하는 데에 사용되는 그래픽이나 음성 파일을 동시에 가리킨다. 그는 인터넷 게임이나 카카오톡의 배경화면을 고르듯 이 이미지를 가뿐히 차용하여 회화의 표면 위에서 또 다른 차원의 스킨들을 다양하게 가공해 나간다.

스킨이라 명명한다고 해서 물감의 두께와 무게가 사라질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이희준의 이러한 전략은 회화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많이 이야기하는 반대의 전략에 비해 최소한 기만적이지 않아서 좋다. 무게와 두께가 없는 이미지의 종류와 양이 나날이 늘어나는 오늘날, 회화 작가인 이희준은 자신의 손에 든 재료의 가능성을 과시하는 대신에 항로를 바꾸는 방식을 택한다. 그는 표면의 물감이 스스로 다른 매체들에게 말을 걸도록 유도한다.

Heejoon Lee, a painter, has been working with various artificial objects found in the city such as architecture, interior design, and speakers for the last six to seven years. However, I think it seems like his genuine subject of study is, in fact, headed toward a different direction. I believe the surface or the layer is a key term to define his work. The list of the objects that I mentioned above may be used as a MacGuffin. In other words, these materials exist as a means to reveal the surface of an object rather than as the subject in which the artist is interested.
 
Let consider Wowsanro 29gagil 84 (2011),a painting he worked on in college. At the center of the work, there is a two-story Western-style house, which was probably the trend during the mid-90s in Seoul, but what he intended to show is not the shape itself but a yellow layer that covers the shape. A malfunctioning projector projected this image in yellow, and he decided to paint it with oil. Thus, perhaps I should call it an image with an error or an error itself rather than an image of a Western-style house.

Then what about The Speakers (2017) Earlier this year, Lee had his solo exhibition at Weekend, where he filled an approximately 142-ft² space in Yeongdeungpo with his paintings of speakers. Here again, what we need to think about is the surface of the canvas, which would have vibrated if there were an actual speaker playing songs. The cubic space of Weekend, which resembled the shape of a speaker, allowed the audience to actually experience what Lee called, “the auditory experience of vision”.

The layer he is interested in sometimes becomes a painterly expression itself. Lee almost compulsively pays attention to the surfaces of his paintings. Almost all of his paintings have sharply distinguished boundaries among the surfaces like a hard-edge painting. The brushstrokes are minimized and stay in a systematic and repetitive form even if emphasized. As a result, we can feel the heavy atmosphere of industrial products. Although he represents a specific object in his work, the surface of the painting stands out more vividly than the object.

For this reason, when he portrays an object, at least two or three layers exist between the artist and the object. This structure shocks those who expect a classical effect from his works. The more you linger on an object, the more you let the significance of the work slip on the surface.

In fact, Lee’s perspective remains the same in this exhibition. The subject of the drawings and paintings is a window blind. The artist was inspired by the blind’s projection of an emerald-green shadow on his living room wall after his new interior construction. Again, he focuses on the moments of the surface of an image that instantly revealed and how it varies over time.

When I visited the exhibition space right after the installation, the first thing that crossed my eyes was, again, the surface of the works. Interestingly, most of the paintings had a matte finish in some parts even though he used a brush and oil paint to finish the works. He said he used a matte varnish to remove the glossy surface. Conversely, the glossy area was overly polished. Other interesting elements were the layers and the brushstrokes. From a distance, the surface of the painting looks very plain and shallow, but as I get closer, I could notice a surface filled with brushstrokes and overlapped layers at the corner of the canvas.

Lee gives the much lighter name of “skin” to this surface, which may well be called weightless to this surface. In general, skin is a term for the outer tissue or shell, and at the same time, it refers to a graphic or voice file used to adjust a user’s screen on the web based on their preference. As if choosing the background of Internet game or KakaoTalk(a popular messenger in S. Korea), he lightly borrows images and applies them to another level of skin on top of the painting surface.

However, it is hard to say that the thickness and the weight of the paint will disappear just because it is defined “skin”. At least it comes fresh for me when I compare the use of strategy of overemphasized possibility of painting to his strategy, which is admitting the flatness of surface. In the circumstance where images without weight and thickness overflows, a painter Heejoon Lee is choosing a different way of painting rather than overstating the medium. He encourages the paint on the surface to calls out other mediums.


빛과 그림자를 평평하게 옮기는 방법 :
이희준 개인전 《에메랄드 스킨》(이목화랑, 2017.11.17.~12.9) 리뷰

How to Flat-Out Light and Shadow
: Emerald Skin, Heejoon Lee’s Solo Exhibition Review


글_최정윤
Text by Jeongyoon Choi
번역_이나정
Translated by Najung Lee
11. 2017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파란색, 녹색, 군청색, 보라색까지 푸른 계열의 색채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색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까닭은 화면 위에 펼쳐지는 형태가 기하학적(geometrical) 선과 면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에 의하면, 이번 전시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양과 블라인드 각도에 따라 그 위에 생성되는 다양한 기하학적 형태”를 다룬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정이나 직장에서 사용하는 일상적 오브제인 블라인드는 이희준이라는 작가의 눈과 손을 거쳐 새롭게 재해석되고, 색과 선과 같은 조형요소의 자유로운 결합을 통해 총 11점의 유화 작업과 30점의 드로잉으로 구현됐다.

2016년 9월, 이희준이 첫 번째 개인전 《Interior nor Exterior: Prototype》(기고자)에서 선보인 일련의 작업은 도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과 건물 내부 인테리어 등 일상 속에서 접하는 건축적 환경의 조형성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됐다. 두 번째 개인전 《Speakers》(2017, 위켄드)에서는 관심의 대상이 여러 종류의 스피커로 옮겨갔으며, 이번 《Emerald Skin》(2017)에서는 블라인드를 다루고 있다. 작가가 어떤 대상을 다룰지에 선택할 때-물론 해당 시기에 그가 관심을 둔 소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겠지만-주제적으로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인상을 받는다. 오히려 그의 작품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그가 대상을 바라보고 화면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치게 되는 환원의 과정 그 자체다.

대상을 2차원의 평면으로 옮기기 위해 작가는 가장 먼저 하나의 주제를 결정하고, 그에 해당하는 이미지를 수집한다. 그 이미지들은 작가가 직접 경험하거나, 직접 촬영한 이미지여야 할 당위가 없는데, 그 이유는 회화 작품 안에 개인적인 감정이나 서정적인 내러티브를 담고자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지극히 3인칭의 시점에서 수집한 이미지를 두고 이리저리 줌-인 혹은 줌-아웃하는 과정을 거치며, 사진을 크롭(crop)한다. 마치 실험대 위에서 관찰대상을 마주한 과학자처럼 말이다. 입체감을 가진 3차원의 오브제는 잘려나간 사진 안에서 선과 면, 색으로만 구성된 평면으로 치환된다. 이 과정에서 이희준은 펜, 색연필, 마커 등을 사용해 수많은 드로잉을 남긴다. 이는 다양한 색과 선의 실험을 통해 새로운 언어로 번역해내기 위한 일종의 초벌 작업에 다름 아니다.

앞서 선보인 두 번의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에서는 대부분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매트한 화면을 만들어냈다면, 이번 전시에서 가장 특징적인 차이점은 유화로의 재료적 변화에 있다. 드로잉에서 그치지 않고, 캔버스로 또 한 번 변용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실험은 일단락을 짓는다. 그는 일정한 분량의 흰색 물감을 섞어 색의 그라데이션(gradation)을 만드는데, 그 붓질 역시 일정한 점으로 집적되어 화면 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반복적인 노동을 통해 물결처럼 남아있는 붓질은 납작하게 치환된 표면 위에 새로운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앞서 어떤 대상을 그릴지에 작가가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그러나 대상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이 표현 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는 듯하다.

빛은 회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윤곽선과 그림자, 그리고 빛은 대상을 더욱 입체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다시 말해, 회화의 역사에서 우리는 빛과 그림자의 표현을 통해 회화적 표면에서 삼차원적 현실성을 구현할 수 있었음을 알고 있다. 블라인드는 빛에 영향을 받고, 그림자를 필연적으로 만들게 된다는 점에서 이전에 이희준이 다루었던 건축적 환경이나 스피커와는 성질이 다른 대상이다. 화면으로 평평하게 옮기는 그의 번역 방식에 일종의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작가 역시 블라인드를 다룸에 있어서 빛과 그림자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전시장을 몇 바퀴 돌아도 직접적으로 묘사한 그림자는 <Venetian Blind no. 3>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작품들에서는 그라데이션의 방식으로 색을 사용하거나, 표면 위에 올라간 물감의 양으로 굴곡을 표현하거나, 표면의 질감을 다르게 마무리하는 등의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재료의 실험은 평평함을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그가 빛 혹은 그림자를 표현할 수 있는 예외적 방식이었던 듯하다.

일전에 농담처럼 팬톤(pantone)에서 매 시즌 선정하는 트렌디한 컬러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어떨지 이야기한 적 있다. 어떤 대상을 실험대 위에 놓을지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어떤 톤의 색으로 그 실험을 집도할지 결정하는 데에도 사사로운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일까, 이번 전시를 아우르고 있는 색의 분위기가 푸른 톤이라고 해서, 차갑고 정적이며 차분하다는 등의 감상평을 남기는 것이 매우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회화의 주제가 되는 대상에서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작가 개인은 지극히 객관적이고 일정 수준 이상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거리두기’가 그의 실험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전 세대의 추상 미술과의 차이를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 지극히 단순하고 직설적인 언어적 표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과학자, 디자이너와 같은 어떤 ‘무심함’으로 회화를 대하는 태도, 매우 건조하게(dry) 느껴질 정도의 선택의 과정들은 그가 앞으로 해나갈 또 다른 실험을 기대하게 한다.


When entering the gallery, you may first notice the harmony of the colors ranging from blue, green, ultramarine to purple. The colors are the first thing noticed, because the shapes are comprised of geometrical lines and planes. According to the artist, this exhibition deals with “various geometrical shapes created by different amounts of light passing through the window and the angle of the blind.” A window blind is a mundane object that we encounter everyday, but through the artist’s eyes and hands, it is reinterpreted with unconstrained formative elements, such as lines and colors, into 11 oil paintings and 30 drawings.

In September 2016, Heejoon Lee held his first solo exhibition, Interior nor Exterior: Prototype (KIGOJA). It dealt with the formal quality of the urban architectural environment, including diverse building styles and interior designs. Then, his interest moved on to different types of speakers, as seen in his second solo exhibition, The Speakers (2017, Weekend), and finally to window blinds in this current exhibition Emerald Skin (2017). The subject of the painting may reflect his interest each time, but it seems like he did not place a huge importance on it. Rather, the key point is the inevitable process of abstraction that the artist does when he goes through his work.

In order to move an object to a two-dimensional plane, the artist first chooses a subject matter and assembles images accordingly. Those images do not necessarily have to be the experience of or taken by the artist, since the purpose is not to contain his subjective emotion or lyrical narrative. Rather, he goes through the images that he collected in a third-person view, zooming into or out of the images and cropping them like a scientist observing an object. The three-dimensional object is converted to a flat plane with lines, planes, and colors. Lee records this drawing process with pens, colored pencils, and markers as a rough draft to translate his experiments on lines and colors into a new language.

For his first and second exhibitions, Lee frequently used acrylic paints with matte finishes; however, this time, he chose oil paints as a medium. In addition, by going from drawing to painting, this experiment has been concluded. He mixed a certain amount of white paint to create a color gradation, and the brushstrokes remained like repetitive marks. Through recurring labor, the gesture of brushstrokes applies vitality on a flat plane. I mentioned earlier that the artist does not emphasize the object on the canvas, but its intrinsic value does affect the method of expression.

Light is one of the most significant elements in painting. Outline, shadow, and light make an object look even more concrete. To rephrase this, we already learned that we can create a three-dimensional reality on a painterly surface with light and shadow from the history of painting. Since the blinds are an object which reacts with the light and inevitably create shadows, they become different from his previous architectural environment or the speaker. His way of translating the object to a flat plane generates an error. It seems the artist also admits that it would be impossible to remove the light and the shadow completely when dealing with the blinds. Only Venetian Blind no. 3 depicts those elements directly, and other works treat them by applying a color gradient or a different amount of paint or different surface texture. This experiment on the material was an exceptional way to express light or shadow while maintaining flatness.

One day Lee made jokes about using Pantone’s color of the year to create works. It seems he does not emphasize choosing the color as much when he is choosing an object to paint. That is why I decided not to emphasize the overall tonal color of the exhibition, as it would be inappropriate for me to write a review of the show with words such as icy, silent, and tranquil. The same applies to the way he treats and expresses the objects of his works. Lee is trying to keep a certain amount of distance from it and maintain an impartial perspective. In addition, this distance makes the work so much more interesting.

If there were a difference between the current abstract art and that of the past generation, it would be the simple and straightforward expression nowadays, something similar to the language of scientists and designers. This attitude of treating paintings with indifference and making very dry selections makes me look forward to his upcoming experiment. 



SPEAKERS -울림의 공간
SPEAKERS - SPACE OF RESONANCE



글_이 채
Text by Chae Lee
번역_이나정
Translated by Najung Lee
03. 2017


평면이든, 입체든지 간에 예술 작품은 형식에 상관없이 저마다 나름의 형용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을 자아낸다. 이는 예술이 우리의 감정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감정적 힘을 지닌 예술은 마치 소리가 무엇인가에 부딪혀 되울려 나오는 현상인 울림과도 같다. 그렇게, 예술은 울림의 방식으로 말해질 수 없는 섬세한 감정들을 자극하며 마음을 움직인다. 혹자는 예술의 형용 불가능성에 대해 클리셰가 되어버린 표현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형용할 수 없음’은 예술의 중요한 요소임과 동시에 예술 작품이 지니는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작가란 누구인가. 어떤 대상이나 현상에 의해 내솟는 울림을 영민하게 형상화하는 이가 아닌가. 소리가 들리기 위해서는 음들이 진동할 공간이 필요한 것처럼 작가도 자신의 울림을 위해서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즉, 울림이 주는 내밀한 사건을 작가는 끈질기게 포착해서 자신만의 공간에 표현하는 것이다.

우선, 이희준의 작업에 나타나는 공간을 보자. 작은 이미지 드로잉 <Speaker Practice Vintage Images>(2017)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형태가 주는 조형적 요소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작년 기고자 전시 《INTERIOR NOR EXTERIOR: PROTOTYPE》(2016)에서 본 전시인 《The Speakers》(2017)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지난 전시가 건축물이라는 비교적 넓은 시야를 가지고 회화적 작업이 이루어졌다면 이번엔 그에 비해 매우 작은 오브제인 ‘스피커’에 집중한다. 이러한 관심의 흐름이 다소 비약이 있어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 존재하는 건축물 이미지를 가지고 평면적인 화면을 이용해 내부도 외부도 아닌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 작업을 풀어나갔던 그가 평면적으로 재구성된 스피커를 통해 전시장 공간 자체를 가상의 공간으로 바꾸어놓고자 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건축물에서 스피커로의 시선 이동은 순서의 차이일 뿐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그는 계속해서 그만의 공간-그 공간은 물리적 공간이나 작가의 마음속 공간이 될 수도 혹은 스피커와 같이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다.-에 대해 평면적 탐구라는 동일한 회화적 주제의식 속에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희준의 공간은 중의적이며 그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의식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과슈로 그린 작은 페인팅은 시리즈인 <Speaker Practice Gouache Drawing 1-18>(2017)은 작업실에서 작품을 전체적으로 볼 수 없어서 그리게 된 드로잉인데, 드로잉을 하게 된 계기에서 알 수 있듯 그가 작업할 때 공간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엿볼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작업함에 있어서 공간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앞서 말했듯이 그의 울림은 대상의 형상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공간에 대한 의식과 평면성에 대한 의식이 대립하기보다는 공간은 평면으로 평면은 공간이 된다.

아홉 개와 세 개의 캔버스로, 총 열두 점으로 구성된 작품인 <Speaker Practice 1-12>(2017)에서 스피커가 그에게 건네준 울림은 어떻게 형상화되었을까. 그가 느꼈을 울림은 단순히 스피커가 소리를 내는 사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피커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생김새인 반듯한 구조와 다양한 형태들의 부품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비개념적이고 규정성을 지니지 않은 감정의 울림을 한번의 포착만으로 회화적 작업으로 표현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크릴릭을 여러 번이고 덧칠한다. 그런 이유로, 얼핏 그의 작업을 보면 플랫한 평면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관찰해보면 서로 다른 두께의 아크릴릭이 겹쳐지고 발라지면서 미묘한 느낌을 만들어 낸다. 마치 화면이 진동하고 있다는 듯이 붓자국이 남아 있으며, 톤 변화를 주며 그라데이션으로 얇게 쌓아올린 배경에서는 소실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깊이감이 느껴진다. 또한 화면에서 주도적으로 위치하는 빨간색 원 주변으로 크고 작은 원들이 배치되어 있는 콤포지션은 리듬이 느껴지는 어떤 선율의 흐름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 흐름은 방향성 없이 마구잡이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원형의 형태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선들과 배경들은 움직이는 듯한 조형요소들을 확장하기도 축소하기도 하면서 울림의 공간을 만들고 구획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검정 선들은 자칫 스피커라는 대상이 사라지고 작가가 느꼈던 울림만을 남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 이런 회화적 시도에 의해 그의 작업은 평면과 입체, 사실적인 이미지의 재현도 순수한 추상도 아닌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게 된다.

다음으로, 이희준는 어떻게 울림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스피커 시리즈는 그가 스피커를 통해 느꼈던 울림의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스피커를 임의적으로 자르고 재배열한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스피커의 모습은 사라지고 직선과 곡선이 서로 대립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그만의 형과 색으로 변환된다. 그 결과 작품들은 임의적인 움직임을 응집하면서 캔버스 화면의 프레임은 문제가 안된다는 듯이 유기적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하면서 추상적 결과물인 울림을 만들어 내며 뻗어나간다. 그럼, 그의 울림은 어떤 공간인가. 그가 구현한 울림은 구체적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들려주는 것, 헤테로토피아! 그의 작품으로 둘러싸인 전시장은 더 이상 실제 전시장이 아닌 울림을 위한 가상의 공간이 된다. 울림만을 위한 공간이다. 전시 공간의 중앙에 서서 시선을 옮겨 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전시장도 그의 작품도, 더 나아가 스피커라는 특정한 대상조차도 사라지고 울림만이 남게 된다. 색과 형태들의 조화와 충돌이 만들어내는 회화적 음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어쩌면 이희준이 그려낸 스피커는 단순히 추상적 결과물로서 시각화되었다기보다는 스피커가 그려진 2차원 평면 자체가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으로 확장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스피커라는 소재를 통해 공간 자체를 각색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울림을 작업에 그려내고 관람객은 작품을 통해 또 다른 어떤 울림을 얻는다. 전시장은 이렇게 작가의 울림과 보는 이들의 울림이 공명하며 형용할 수 없는 어떤 느낌들로 가득 메워진다. 그렇다면, 이희준의 울림은 무엇인가. 그가 포착한 울림이 어떻게 들리는 것일까. 그 이유는 조형성에 대한 추구가 단순히 대상이 지니는 상징성만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대상에 의해 느꼈던 느낌들을 자신의 회화적 언어로 바꾸어 나가는 지점에 있다. 더 이상 스피커는 스피커로서 남아있지 않는다. 본래 대상이 지니는 형상성은 제거되고 그만의 회화적 언어로 가공되며 그가 느꼈던 형태로, 회화의 방식으로 붓을 통해 끈덕지게 재구성된다. 종국에는 회화로 귀결되고자 하는 그의 작업 태도와 맞닿아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총체적으로, 이희준의 작업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화면에 내적으로 조직되어있는 회화적 감각의 울림에 의한 것이다.


Whether flat or solid, individual art work arouses its own inexplicable feelings regardless of its form – art is connected to our emotion. Art with emotional force is similar to an echo, a reflection of sound from the surfaces; art stimulates a delicate emotion beyond the words to speak to the heart. Some claim that it is almost cliché to talk about indefinability of art; however, ‘inexplicability’ is, indubitably, one of the most important elements in art symbolizing its essence. What is the role of an artist? It is to materialize a reverberation of an object or phenomenon accordingly. As sound waves need a space to travel, it is important for artists to hold personal space for their own resonance as well. In other words, they persistently capture discrete incidents caused by vibration and present those incidents in their own space.

First, let’s take a look at the space in Heejoon Lee’s works. From a series of small image drawings, Speaker Practice Vintage Images (2017), he is triggered by the plasticity of elements in a formative structure. This interest continues from his first solo exhibition, INTERIOR NOR EXTERIOR: PROTOTYPE (2016) to the current exhibition, The Speakers (2017). While he focused on architecture for the last show, this time, he narrowed his perspective to a rather smaller object, speaker. This may be a slight jump in a theme, but it is a reasonable movement when considering the fact that the artist, who had created a neither interior nor exterior space with architectural images is now changing the entire exhibition space into a virtual one with a restructured speaker on a flat surface.

He continues to explore with the same subject, a flat surface in his own space – the space which can be his physical space, mental space, or even a speaker among others. In this context, his space has a dual meaning and becomes a consciousness which penetrates through his oeuvre. For example, he made Speaker Practice Gouache Drawing 1-18, a small painting series in order to get a large picture of the whole exhibition view due to his small studio space. This reveals how much space is significant to the artist. Once again, his vibration originates from the form of an object. To the artist, the consciousness of space and that of a flat surface do not contrast; rather space becomes flat, and vice versa.

Then how is the reverberation of the speaker projected on Speaker Practice 1-12 (2017), a 12-canvas series of works? The speaker, for the artist, is not a simple medium for sound, but is an assembly of a structure and various components. Because it is impossible for him to capture the vibration of neither conceptual nor regulated emotion at a glance, he paints acrylic on canvas repeatedly. For that reason, his works may seem flat at a distance but when seen closer, layers of colors and different thicknesses of paint arouse subtle emotions. The surface is filled with brush strokes as if it is vibrating, and the layered background with tonal gradation alludes to depth even without a vanishing point. Moreover, the composition of small circles around bold red circles presents a melodic flow of lines. Those geometric figures and lines, however, are in fact not improvised. They allocate or create space for resonance by enlarging or subtracting formal elements. Especially the lines in black prevent the possibility of the speaker from vanishing as an object and leaving only reverberation behind. Based on this painterly attempt, his works are placed somewhere between flatness and solidity, and representational image and pure abstract image.

Then the question of how Heejoon Lee creates the space of resonance follows. In order to realize what he felt through the speakers, he arbitrarily cropped and rearranged the images. Now the form of the speaker vanishes and turns into a new color and form where lines and curves contrast yet harmonize. As a result, regardless of the limit set by each canvas frame, the paintings overlap or conflict with each other by clustering arbitrary movements to form an abstract outcome, ‘resonance.’ Then how do you define this space? It is a realization of an indescribable object despite its specificity —  Heterotopia! Now the exhibition space no longer embraces the reality; it is a virtual space only for reverberation. Let yourself stand in the middle of the exhibition space and submerge into each work of art. Then there will no longer be an exhibition space, paintings, or even specific objects like a speaker. What is left in the space is ‘reverberation.’ There lies a pictorial yet auditory world created by collision and harmony of colors and shapes. Perhaps, a painted speaker by Heejoon Lee is rather an expansion of two-dimensional space into heterotopia space than just a visualization of abstract outcome. Namely, he is adapting the space itself via the speaker. 

The artist paints his resonance and the audience acquire their own through the works. The space is filled with shared reverberations in addition to undefinable emotion. Then what is Heejoon Lee’s resonance and how does it get transferred? In spite of depicting a mere symbol of an object, he is attempting to transcend his emotion into a visual language in painting. The speaker is no longer itself. The original form of an object is removed, transformed into its own language, and restructured into a new language with brush strokes — this is his attitude to conclude his work into painting in the end. Overall what makes his work prosperous is his painterly sensorial resonance, organized innately on a surface.


납작하게 짓는다는 것 : 《Interior nor Exterior: Prototype》에 관하여
Building Flatways: Study on Interior nor Exterior: Prototype


글_추성아
Text by Sungah Serena Choo
번역_임다운
Translated by Alba Dawoon Lim
09. 2016

“…주변의 풍경이 더 이상 사실 같지 않을 때까지. 찰나 동안이라도…장소 자체가 기이해질 때까지. 마을이 무엇이고, 거리가 무엇이며, 건물이나 포장도로가 무엇인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될 때까지.” (조르주 페렉, 1974)


우리는 건축물이나 사물을 보면 어김없이 그것 각자가 자리잡고 있는 위치에서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환경과 연결시켜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우연히 마주친 장소의 벽 색깔, 천장 높이, 거리 구조에 따라 자의적인 연상을 하는 등 건축물이 보여주는 물리적인 매체와 형식을 감정이나 관념으로 인지한다. 그 결과 건축이 담고 있는 공간과 표면의 여러 양식은 우리가 그것과 조우했던 순간과 배경의 감정적 기념물이 된다. 유리의 여러 면들이 날카로운 선으로 불평 없이 만나는 상황, 콘크리트 벽면과 기둥들이 지붕과 어색함 없이 맞닿는 상황처럼 어느새 도시 풍경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건축물의 특징들은 공통된 문화적 산물이 되어버렸지만 분명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이한 풍경으로 다가오는 찰나들이 존재한다. 이와 같이, 한편으로는 ‘시간’을, 다른 한편으로는 ‘공간’을 상상과 개념 속에서 파악하려는 태도는 공간에 있어서 깊이와 구조 같은 실제적인 것들을 생략시키고 관찰자의 망막으로 더욱 평평하게 추상화된 외피(skin)들을 더듬어 나간다.

이희준은 모더니즘의 페티시적인 특성이 강조된 커튼월의 유리 건축, 경제성이 구현된 현대적이고 민주적인 콘크리트 벽면과 기둥, 반복적인 형태의 계단 그리고 구조적인 뼈대가 강조된 사물에서 드러나는 질서와 복잡성이 병치되는 지점을 찾는다. 그는 강한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의 물리적 요소들과 일상의 건축환경에서 추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형태, 배열, 색이 도드라진 미니멀리즘적 감수성의 건축 이미지를 차용하여2차원의 캔버스 화면으로 가져온다. 여기서 수집된 건축 이미지는 대부분 디지털 이미지로 존재하거나 그 과정을 거친 이미지들이다. 이미지를 해체, 분할하여 조합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이미지에서 특정 부분을 크롭함으로써 대상의 정보가 잘려나가면서 본래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재현적인 형상이나 의미와 가치가 제거된다. 이희준은 남겨진 화면에서 그 구조의 단면을 바라보고 지극히 납작해진 공간의 표면을 회화적인 표상으로 치환한다. 

공간의 시간성이 드러나는 요소들은 임의로 잘려나가 걸러진 화면에서 회화라는 장치를 통해 절단된 공간의 형태로 나타나거나 캔버스 위에 미묘한 공간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화면에서 구성요소들의 소실점을 배제시키고 각각의 경계에서 공간감을 실험하는가 하면 또, 물감 색조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내부와 외부의 거리감을 모호하게 하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실제 이미지 속에서 콘크리트 벽 뒤에 가장 원경의 층계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음영이 사라지고, 캔버스 화면에 일련의 붓 자국으로 표현하는 등 대상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공간에 표피적으로 투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Interior nor Exterior no. 4~7>(2016) 시리즈의 회화는 작가가 건축 공간의 재료와 구조, 장소(site)와 프레임이 자신이 구축한 화면 안에 이미지의 효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탐구해 보는 프로토타입들이다. “Interior nor Exterior”는 내부도 외부도 아닌 것을 의미하듯이, 공간과 평면을 탐구하는 데에 건축물이나 사물의 내부와 외부가 서로 충돌과 전복을 반복하면서 때로는 눈속임 회화(trompe-l’oeil)처럼 안과 밖 그 무엇도 아닌 순수한 시각적 환영(optical illusion)을 허용하기도 한다.

화면 위에 각기 다른 붓터치들은 아주 얇은 표면에서부터 끈적한 마티에르를 두텁게 올리는 작가의 태도로써 회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들을 화면에 충실히 보여준다. <Interior nor Exterior no. 4>(2016)의 경우, 캔버스 화면이 아홉 가지의 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중앙에 가까이 위치한 예각의 아주 가늘고 날카로운 흰색 삼각형은 이희준의 프로토타입들 중에서 물성이 가장 두드러진 두께감있는 색면일 것이다. 반면, 가는 흰색 실타래를 엮어놓은 듯한 물성은 양 옆의 얕은 표면에 의해 그 자체만으로 매우 건축적으로 다가오기까지 한다. 이희준은 콘크리트나 유리 벽면과 같이 건축 외피가 드러나는 부분은 물감의 질감과 색채를 통해 그라데이션을 표현하므로 화면에 감각적인 리듬감을 주며 흑백 면들을 삽입하여 투시도적 공간감을 초월하는 모순적인 화면을 구성하기도 한다. 이처럼, 화면에서는 건물의 형태가 두드러지지 않도록 자칫 조각적이거나 압도적일 수 있는 이미지를 피하고, 묵직한 덩어리와 건축적 소재를 회화-표면의 즉물성에 대한 경험으로 대체한다. 동시에 프로토타입 시리즈는 큐비즘적인 외피와 같이 건축물의 상이한 기능들을 숨기면서 대상 자체를 도식적으로 묵살시킨다.

<Interior nor Exterior no. 1>(2016)은 작가가 유일하게 사물을 대상으로 한 걸개그림이다. 구체적인 형태의 구조와 기능이 여실히 노출된 바우하우스 양식의 의자는 두 개가 나란히 교차되어 수직으로 방향이 뒤틀어져있다. 두 장의 캔버스 광목천 각각에 마주하고 있는 이미지는 데칼코마니 방식으로 화면을 구성하며 의자의 꺾인 경계와 안과 밖의 면이 어릴 적 색칠공부하듯이 동일한 구역들에 동일한 색들로 채워져 있다. 마치 60년대 스텔라(Frank Stella)와 신조형주의(Neo Plasticism) 회화를 보듯이 색면추상(Color-Field Abstract)을 떠오르게 한다. 걸개그림의 화면에서 가장자리를 잡아주는 프레임은 존재하지 않고 불필요하게 남은 부분(left-over) 또한 없이 규칙을 이루는 색면들은 빼곡하게 채워져 어떠한 여백도 허용하지 않는다. 저만치 먼 발치에서 응시했을 때 화면 전면에 드러나는 곡선과 직선의 긴장감과 대칭의 구조는 하나의 원근법이 강조된 기념비적인 건축물로 다가오기도 한다. 역으로, 이 형상은 삶의 세계에 놓인 사물로도 평평한 표면 위의 형태로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이것은 시각적 장(visual field)이라는 특정한 영역에 놓인 부재(absence)로서 풍경인지 사물인지 그 무엇도 지시하지 않는 알 수 없는 표면(skin)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희준의 회화는 무엇으로 규정해야 할까. 그동안 기호의 소비지상주의적 얄팍함과 사물의 연쇄적 반복성이 현대화된 건축과 회화에서 동시에 나타났듯이, 작가의 프로토타입 연작은 그 안에서 대상에 대한 상징보다는 공간 속의 형태와 구조를 2차원의 평면인 회화적 상황에 놓여있다. 실제 공간이 담고 있는 입체적이고 구조적인 공간들을 나열했을 때, 작가는 이미지로 세상을 보고 이해하며 단편적으로 대상에 대한 정보와 감각을 습득하는 현재의 방식에 걸맞게 그 부피와 질량보다는 평면적으로 납작하게 전환되는 모순적인 지점에 흥미를 가진다. 즉, 속도, 강도, 힘, 방향성 같은 역동적인 속성을 지닌 건축물의 “얼어붙은 동작(frozen motion)”들을 안도 밖도 아닌 압착되어 있는 풍경으로 회화적 환경에서 구현함으로써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시각적이고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한다. 이와 같이, 그의 회화는 감각을 쫓는 가공된 느낌의 강한 색면들이 잘려나가 서로 충돌함으로써 동시대 회화의 지표를 표면, 지지대(support) 그리고 물감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본 글의 전반부에 인용한 페렉(Georges Perec)의 문구는 이희준이 공간과 풍경을 향해 회화와 건축물에서 나타나는 평면적 벡터들을 추상적인 감각의 표피로 인식하는 태도와 닮아있다. 그의 글에서는 사물, 공간, 풍경, 시간이 집요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되면서 어느 순간 그 대상들이 내포하는 삶의 방식과 생활 형식들이 함몰되고 독자는 그것들을 매우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형식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위의 글에서 페렉이 언급한 “더이상 실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풍경들”은 마치 실제공간의 은유인 회화에서 재현하는 관습에 저항함을 암시하는 것과 같다. 나아가, 이희준의 회화에서 드러나는 환영의 문제는 조각적이거나 재현적인 것이 아니라 추상의 시각적인 감각으로 이루어진 표피에 집중한다. 그리하여 회화가 갖는 상징적인 힘은 사라지고 본질에 가까운 회화의 명료한 제작 방식에 집중되는 형식적인 탐구를 한다. 회화의 지지대 위에 감각하는 찰나를 기하학적으로 짓고(build) 칠하는(paint) 행위는 표면이 공간만큼 중요해지고 또 외피에 대한 이해가 구조에 대한 이해만큼이나 중요하게 부각되는 순간임을 의미한다.

“Until the surrounded landscape become no more like real. Even for a moment… Until the site itself becomes odd. Until you don’t know what is the town, the street, the building or the road...” (Georges Perec, 1974)

When we are looking at the architectures or things, it is natural to perceive those by correlating the historical and personal environment from their own positions. It means that we are cognizing the physical medium and the format that the architecture shows us as emotions or ideals like following arbitrary association according to the color of the wall, height of ceiling, and structure of the street that we came across. Therethrough the various styles of the space and the surface that the architecture contains became an emotional monument of our moment and the background of encounter. At some time, features of the architecture that easily can be found in the cityscape - Just like the moments that the several sides of glasses are facing without complain and that the concrete walls and columns are against the roof without awkwardness - became a common cultural products, however, still there is a momentariness that we felt those as unfamiliar landscape. Thus, an attitude that eager to grasp “Time” on the one hand, and the “Space” on the other hands in imagination and notions skips the actual things like depth and structure for space and fumbles the more flatten and abstracted skin with observer’s retina.

Heejoon Lee seeks the point where the order and the complexity is juxtaposing that appears from the building of glassed curtain wall that of Modernism’s fetish feature is accentuated; a modernized and democratic concrete walls and columns that the economic feasibility is materialized; stairways in repetitive form and things that the structural frames are highlighted. The artist brings the physical elements that arousing a powerful image and the architectural images of minimalism sensitivity, that the form, order, and color is remarkable which creates abstracted images from daily architectural environment, onto two-dimensional canvas frame. These collected architectural images are mostly existed as digital or have been digitalized. The artists cut off the Information of the subject by cropping the certain parts from the whole image, not by combining the dismantled or disassembled image. Thereby, the representative figures or the meaning and value are removed from where it originally belongs to. Lee finds the cross section of the structure from the left images and substitutes the extremely flattened surface of the space into a malerisch (picturesque) presentation.  

The elements that shows the temporality of the space, in the randomly cut off and filtered picture, appear in the form of cropped space or build a subtle sense of space on the canvas throughout the tricks of painting. For example, it excludes the vanishing point of the components on the canvas to experiment a sense of space on each border, or makes an attempt to blur a sense of distance of the inside and the outside by the differences of shades. It is visible that the artist’s cognition of the object is projecting into the space superficial by the shade on the stairways located furthermost where behind the concrete walls is eliminated and replaced to the serial brushstrokes on the canvas.

The series of Interior nor Exterior no. 4 to 7 is a prototype that the artist explores how the medium, structure, site and frame of the architectural space work as an image effect inside the screen that he established. Like the meaning of the title, Interior nor Exterior, to explore the space and the flat surface, sometimes the interior and the exterior of the architecture or the things allows a pure optical illusion which is neither in nor out like trompe-l’oeil over the collision and the overset on each other.

Different brushstrokes on the screen faithfully shows the minimum tricks of painterly expression which is equivalent to the artist’s attitude started from the ultrathin-layered-surface to the thick-layered-matière. In case of Interior nor Exterior no. 4, composed of nine different colored planes, the white acute triangle in the center shall be the one with the most noticeable properties of matter and thickness among the artist’s prototypes. On the other hand, the matière which is like a knotted skein of very fine white thread seems even constructive against the thin-layered-surface on both sides of it. Simultaneously, Lee forms a contradictory screen that transcendent a space perspective by giving sensuous rhythm and inserting black and white fields as he expresses the parts where shows the skin of the architecture, like concrete or glass walls, through gradation with texture and shade of the paints. Thus, the artist refrains the sculpture-like or overwhelming images to keep the indistintive shape of the building, and converts the volumed mass and the architectural materials into an experience regards to the objectivity of the paining-surface. The series of prototype conceals the disparate functions of the architecture and disregards the subject itself schematically like the cubist skin.

Interior nor Exterior no. 1 (2016) is the only scroll painting of the artists aimed at the object. Two Bauhaus chairs that exposing the structure of concrete form and the function are intersecting alongside each other and twisted to vertical direction. The images facing each other on the two canvas cottons are constructing the screen in decalcomania way. The folded boarder of the chair and the sides of in and out is filled with same color in the same place like a coloring play book. It reminds Color-filed Abstract paintings like those of Frank Stella in 60s and Neo Plasticism. There is no physical frame to fix the edge of the scroll and no margin is allowed with regular fulfilled color-fields without left-over. The structure of symmetry and tension of curved and straight lines could be found all over the screen through distant view seems like a monumental architecture emphasizing on single-perspective. Or, conversely, this shape also looks like neither a real objet on the real world nor a shape on the flatten surface. It is just an unidentified skin indexing neither landscape nor object as an absence lay down on the specific area of visual field.

If so, what could be the artist’s works defined. The artist’s series of prototype is lying down the shape and the structure from the space on the painterly situation, a two-dimensional flat surface, rather than the symbol of the subject, as the consumerist shallowness of sign and the chained repetition of objects is simultaneously appeared to the modernized architectures and paintings in the meantime. The artist views and recognizes the world by images when he lists the three-dimensional and structural spaces where the real space is containing, and dials into the contradictory point where the object converted into flatways rather than its volume and mass, suitable for the current methods to acquire the information and the sense of the object fragmentarily. In other words, it makes the audiences to embracing it visually and instantly by embodying the “frozen motion” of the architecture, that has dynamic nature of velocity, solidity, strength, and directivity, as pressed landscape neither in nor out on the painting condition. Therefore, Lee’s paintings could define the index of the contemporary painting as surface, support, and paints by the clash of cropped out color-fields which are chasing the sense and processed.

The words from Georges Perec quoted at the preface resembles to the attitude that Lee recognize the flat vectors appearing on the painting and architecture as the abstract surface of sense in regard to the space and landscape. The realistic description of an object, space, scope and time goes on pertinaciously in his words makes the ways and forms of life to collapse and makes the readers to see it very abstractly and formally at the same time. “The odd landscapes that you are not able to figure out its hypostasis anymore” that Perec mentioned above is equivalent to implying the custom of represent in the painting which is a metaphor of real space. Furthermore, what the matter of illusion from the artist’s oeuvre focus is not about sculptural or representative, but about the skin which is composed of visual sense of abstraction. Therefore, the symbolic power of the painting is vanished and study that focus on the clear way of producing more close to the essence of painting is processed. The action building and painting the sensory moment on the support of painting means the moment that the surface and the notion about the skin is highlighted crucially as much as the space and the notion about the structure. 



평면의 시간들
Flatten Times

글_이주희
Text by Juhee Lee
09. 2016



“조형적 구조와 표면의 감각으로 이루어진 회화적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자 “조형성의 추구와 생활세계에 대한 개인의 의견을 반영”(기획자)하고 있다는 이희준의 개인전이 기고자에서 열렸다. 작가는 건축물에 대한 피상적인 단순화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공간을 수용하고 감각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론이자 연구과정을 ‘프로토타입’이라는 개념의 전시로 선보였다.

그가 제시한 작업은 화면 내부의 예각과 둔각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거나 뒤엉키는 경계들에서 어렵지 않게 건축물의 모티프를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요소로 흑과 백을 포함한 높은 명도와 채도의 배열을 볼 수 있으며 먼셀색상환 각각의 사이에 자리할 혼합색조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색채의 대비는 첨예한 경계들을 강조하고 있으며 더불어 곡선의 경계 내에서 흐르는 듯한 인상과 그라데이션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자신이 화면으로 불러올 피사체를 “내부도 외부도 아닌 어떤 공간”으로 상정했고 “현대의 건축적 조형성을 바탕으로 한 추상적인 풍경”으로 구체화 했다. 드로잉은 주제를 심화해 나가며 화면 속 조형을 확정 짓기까지의 과정이자 결과물이었으며 여기서 드로잉과 페인팅의 구분은 묘법과 소재에 의한 것이라기 보단 작가의 작업방식을 따르며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드러내고 있다. 작업은 〈Interior nor Exterior-Oil Drawing no. 1-12〉(2015)로 표기된 드로잉과 〈Interior nor Exterior no. 1, 4, 5, 6, 7〉로 표기된 페인팅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제작 순서를 따르자면 2015년의 드로잉 이후 대형 페인팅〈Interior nor Exterior no. 1〉(2016)(이하 줄여 〈페인팅 no.1〉)이 등장했으며 다음인 4-7번의 경우 먼저 제작된 드로잉을 페인팅으로 옮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희준의 드로잉과 페인팅은 두 개의 평면에서 각각 다른 태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회화는 평면적이자, 사(史)적 집합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연장선상에서 점선면과 색, 이들로 이루어진 화면 또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인상(印象) 등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희준의 화면에서 도드라진 부문의 첫째 것이 색이라면 둘째의 것은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은 작가가 일정시간 피사체를 겪어내며 인상을 형성하는 ‘작가의 시간’과 작가가 화면으로 불러들여야 할 ‘피사체의 시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중 후자인 ‘피사체의 시간’은 피사체가 실재한 물리적인 시간과 사(史)적 시간을 효과적으로 중재하여 평면으로 수용하는 작가의 시선에서 찾을 수 있다. 드로잉과 페인팅이라는 구분에서 비교적 앞서 제작된 드로잉이 ‘피사체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평면 위에 수용하고 있다면 뒤에 제작된 〈페인팅 no.1〉은 작가가 피사체를 겪으며 마주했을 ‘작가의 시간’과 인상이 적극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페인팅 no.1〉의 경우 작가에게 드로잉 이후이자 페인팅의 시작이라는 분기점이 된다. 특징적인 부분이라면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사물인 ‘의자’를 피사체로 삼았지만 의자의 크롭된 영역의 형상을 따라 꺾어지는 화면 속 동세는 여전하다. 12개의 드로잉 중 다수에서 발견되는 그라데이션은 색에 있어 명과 암 쌍방으로의 이동 과정이며 회화의 진행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붓질을 담아내는 시간이다. 원근이 적극적으로 연출된 화면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이는 단순한 색면회화 일색으로 보일 수 있는 화면에 라이트모티프로서 하나의 결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페인팅의 경우 드로잉에서 발견되었던 ‘피사체의 시간’을 없애가며 색면의 밀도를 높이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보인다.

현시점의 작업에서는 회화의 시간적 요소보다 작가가 소화해 낸 인상을 변환한 색면이 도드라진다. 이에 필한 것이 작가 자신만의 시공간을 받아들이는 방법일 것이고 이를 진전시키는 것은 ‘작가의 시간’에 준할 것이다. 이희준의 작업은 최소한의 회화적 표현을 지향해 나간다는 점에서 과거 미니멀로 이행되었던 색면회화의 한 반향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연구과정 중에 있는 평면으로 프로토타입 공개 이후 프로로토타이핑(prototyping)의 기간 동안 발생할 해석의 여러 층위들은 변화의 소지를 내재하고 있다.